세례 요한처럼 내가 아니라 주님이 드러나게 하라

세례 요한은 태어날 때 이름을 짓는 문제와 연관하여 그 부모와 친척 간에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친척들은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이니까 가문의 명예를 위하여 사가랴 2세로 짓자고 했지만 그 부모는 하나님의 계시대로 요한으로 짓기를 원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자신들의 아이도, 가문의 아이도 아니고, 바로 하나님의 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요한을 히브리어로 요나라고 합니다. 이 말에는 요나가 죄악의 도성 니느웨를 회개시키는 설교를 한 것처럼 세례 요한도 하나님을 떠나 죄에 빠져있는 유다 백성들을 회개시키고 부흥시키는 사명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이었고 그의 사명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말 4:5-6; 눅 1:17).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에 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눅 3:3). 그는 메시아 그리스도를 맞이하려면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간다면 세수도 하고 메이크업도 하고 단정한 옷을 입고 가지 않겠습니까? 구약에서도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려면 의복을 빨고 몸도 정결하게 하고 마음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이런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메시아를 만날 수 있겠느냐? 이제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메시아, 그리스도가 오시게 되는데 이렇게 더러운 마음과 죄를 가지고서는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한다. 유대인이라고 해서,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만나야만 한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하였습니다(눅 3:4). 소리는 보이는 모습이 아닙니다. 말로써 외칠 뿐입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모습으로 보이는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모든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끝까지 붙들고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주님께 보내면서 자신은 신랑의 친구이지 신랑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교인들이나 사람들을 우리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써선 안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을 원하시는 대로 사용하시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참으로 겸손한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자신은 그분의 종도 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요 1:26-27).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시선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집중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고 자기는 쇠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왕이 한 번은 나귀를 타고 동네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나귀등에 타고 가는 왕을 보자 모두가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그 때 나귀는 자신에게 절을 하는 줄 알고 교만을 떨다가 매를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종이 주인의 영광을 착각하거나 가로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사 기드온이 소명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이 하나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한지라”(삿 6:21). 여기에 보니까 불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지팡이에서 나왔습니까? 반석에서 나왔습니까? 우리들이 생각할 때 지팡이에서 불이 나왔을 것 같지만 오히려 불은 반석에서 나왔습니다. 지팡이의 목적은 그 관심과 시선을 반석에게로 지시하게 하는 역할입니다. 여기서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우리는 반석이 아닙니다. 반석을 가리키는 지팡이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처럼 오직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자들이나 사역자들 가운데 그 마음이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인격과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유니스 맥개러한(Eunice McGarrahan)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대 의상(costume)은 당신이 입을 때 당신이 입은 옷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반면에, 제복(uniform)은 당신은 바로 입고 있는 그 옷 자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주님을 드러내야지 내가 드러나서는 안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마라”(롬 13:14). 우리가 회개하고 마음을 겸손하게 하면 골짜기나 산과 같은 우리 마음이 평탄하게 되어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들일 수 있습니다(눅 3:4-5). 그래야 하나님과의 교통이 열리게 되며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은혜와 은사가 선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 세례 요한처럼 겸손함으로 주님만 자랑하고 높이며 주님의 재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Author || 홍영기 목사 (Rev. Ph.D. Joshua Hong)

교회성장과 리더십 전문가인 홍영기 목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과 비전의 사람입니다. 이를 위해 교회 지도자의 리더십을 개발하고 건강한 교회성장을 돕고 컨설팅 하는 것이 그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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